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다이고 덴노 (문단 편집) === 필사의 탈출 후 [[남조#s-1.4]] 수립 === 고다이고 덴노의 군대에 타격을 입힌 다카우지는 지묘인 황통인 [[고곤 덴노]]의 동생 [[고묘 덴노]]를 옹립하고, 히에이산으로 쫓겨간 고다이고 덴노에게 화의를 요구했다. 고다이고 덴노도 이에 응해 [[삼종신기]]를 고묘 덴노에게 넘겨주고 가잔원에 유폐됐으며, 이후 다카우지는 '''[[무로마치 막부]]'''를 창설했다. 하지만 고다이고 덴노는 또 다시 근성의 탈출을 감행해 [[페이크다 이 병신들아|삼종의 신기는 가짜라고 외치며]] 교토를 떠나 요시노에 정주했고, 정통성은 자신에게 있다며 또다른 조정을 수립했다. '''이로써 일본 열도는 [[남북조시대(일본)|난보쿠초 시대]]의 동란에 돌입하게 되었다.''' 친왕들을 각지로 파견해서 지방 세력을 포섭하려고 시도해봤지만 전세를 뒤집지 못했고[* 그가 붕어한 지 1년 후인 1340년경의 남북조의 영역을 보면, 면적도 남조쪽이 열세이려니와 영역 자체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래서 남조는 자주 수도를 옮겨다니곤 했다. 그렇지만 다카우지 생전에는 북조 역시도 남조를 상대로 우위를 차지하진 못했으며, 심지어는 일시적으로 교토를 뺏기고 북조의 상황 두 명과 덴노가 포로로 잡혀가기도 했기에 북조가 남조를 제대로 앞지르는건 남조 제3대인 [[조케이 덴노]] 시기부터였다.] 결국 1339년 병으로 쓰러져 노리요시 친왕에게 양위한 다음 금륜왕사에서 역적 토벌과 교토 탈환을 유언으로 남기고 붕어했다.[* 군담소설인 《태평기》에 따르면 고다이고 덴노는 죽던 순간에 병상에서 한 손에는 칼, 다른 한 손에는 《[[법화경]]》을 들고 "'''비록 짐의 뼈는 남산(요시노)의 이끼에 묻히더라도, 짐의 혼백은 늘 북궐(교토, 북조를 가리킴)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라며 자신을 높은 산봉우리에 묻어달라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통상 남쪽으로 향하도록 묻는 천황의 능과는 달리 고다이고 덴노의 능은 북쪽을 향하고 있다.] 그의 붕어 소식을 들은 숙적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고다이고 덴노의 명복을 비는 덴류지를 건립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